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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이 유별난 까닭 N
No.1224167- 작성자 김태환
- 등록일 : 2015.06.09 09:38
- 조회수 : 314
한글날이 유별난 까닭
김윤식 명지대 석좌교수
10월 9일은 한글날이었다. 어째서 10월 9일인가. 1940년 9월 훈민정음 원본이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었다. 그 끝에 정통 11년 9월 상한(正統 十一年 九月 上澣)이란 글이 있어 그 반포의 날이 대강 밝혀졌다. 상한을 그 달 상순의 끝날인 9월 10일로 잡고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자 1446년 10월 9일이었다. 1946년 한글 반포 500돌을 맞아 한글날을 공휴일로 정하고 덕수궁에서 내외 귀빈 및 유지 2만여 명이 모여 기념식을 올렸다. 이후로 10월 9일이 공휴일로 되어 내려왔으나 근자에 와서는 공휴일에서 빠졌다. 이런저런 이유가 응당 있었을 터이기에 그 곡절에 대해 시비하거나 따질 힘이 내겐 없지만 이 한글날이 지닌 유별난 의의에 대해서라면 소리쳐보라고 내 전공 쪽이 나를 충동질하고 있다.
내 전공은 한국근대문학(사)이다. 이 범주에서 핵심에 놓인 것은, 모두가 아는바, ‘근대’이다. 근대문학이란 무엇이뇨. 국어로 하는 문학을 가리킴이 원칙이다. 국어란 또 무엇이뇨. 국가어의 준말이다. 이 경우 국가란 국민국가를 가리킴이 아닐 수 없다. <무정>(1917)이나 <진달래꽃>(1925)이 한국 근대문학인 것은 그것이 한국의 국어로 씌어졌음에서 말미암았다.
여기에는 자칫하면 이런 의문이 솟기 쉽다. 일제의 식민지로 편입된 마당인데 어디 한국의 국민국가가 있었던가가 그것. 이 의문이란 실상은 당초부터 성립되지 않는다. 상해 임시정부가 엄존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 통치부는 교육제도, 행정제도, 토지제도, 금융제도 등을 식민지화했지만 문학만은 당초부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제가 한국문학을 식민지화하기로 작정한 것은 1942년 10월 1일을 기점으로 했다. 조선어학회 사건(1942. 10. 1)이 그 증거이다. 33인을 이 사건에 연루시킨 것도, 총독부 시정일(始政日)을 겨냥한 것도 이를 말해주고 있다.(이인, <반세기의 증언>, <조지훈 문학전집(4)>)
조선어학회란 새삼 무엇이뇨. 숨은 신으로서의 ‘한국 국민국가’의 대행기관이자 그 실체였음이 정답이다. 조선어연구회(1921)를 이어받은 조선어학회(1931)는 국민국가로서의 임시정부의 대행기관이기도 했다. 맞춤법통일안(1933)이 발표되었을 때, 당시의 문인 78명(이광수, 이태준, 김기림, 박태원, 정지용, 임화, 염상섭, 이기영 등)이 전폭적으로 호응한 것도 이를 새삼 증거한다. 일제 통치부가 한국문학마저 식민지화하고자 한 것은 따라서 조선어학회 사건 이후이다. 그동안 한국 근대문학은 근대문학으로서 완전한 것이었다. 검열 따위란 이 대원칙에 비하면 한갓 사사로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사회에서나 터부란 있는 법이기에 그러하다. 문학이란 어떤 터부도 뛰어넘기에 그러하다.
거듭 말하지만, 일제 통치부가 한국문학을 식민지화하고자 한 시기는 1942년에서 광복(8·15)까지 2년 2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기간 동안에도 우리 문인들은 일어로, 혹은 조선어로 이런저런 글을 썼다. 이른바 이중어글쓰기 공간의 글쓰기가 진행되었다. 그런 글들의 평가 기준 및 의의는 별개의 연구과제라 할 것이다.
한국근대문학사의 시선에서 보면 이 암흑기는 어떠할까. 물론 암흑기일 수 없다. 중경 임시정부가 엄존해 있었음과 동시에, 조선어학회의 법적 투쟁이 진행중에 있었음이 이를 새삼 말해준다. 조선어학회 공판(1945. 1)이 있었지만 고등법원에 상고했고 그것이 기각된 것은 1945년 8월 13일이었다.
조선어학회란 새삼 무엇이뇨. “조선 독립을 위한 실력 신장의 수단”(판결문)이었다. 곧 문학의 처지에서 보면 한국의 국민국가의 언어를 관장하는, 국내에서의 실체였다. 그동안 한글날을 국경일로 해왔던 이유 중의 으뜸 항목은 여기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리라.
김윤식 명지대 석좌교수
10월 9일은 한글날이었다. 어째서 10월 9일인가. 1940년 9월 훈민정음 원본이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었다. 그 끝에 정통 11년 9월 상한(正統 十一年 九月 上澣)이란 글이 있어 그 반포의 날이 대강 밝혀졌다. 상한을 그 달 상순의 끝날인 9월 10일로 잡고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자 1446년 10월 9일이었다. 1946년 한글 반포 500돌을 맞아 한글날을 공휴일로 정하고 덕수궁에서 내외 귀빈 및 유지 2만여 명이 모여 기념식을 올렸다. 이후로 10월 9일이 공휴일로 되어 내려왔으나 근자에 와서는 공휴일에서 빠졌다. 이런저런 이유가 응당 있었을 터이기에 그 곡절에 대해 시비하거나 따질 힘이 내겐 없지만 이 한글날이 지닌 유별난 의의에 대해서라면 소리쳐보라고 내 전공 쪽이 나를 충동질하고 있다.
내 전공은 한국근대문학(사)이다. 이 범주에서 핵심에 놓인 것은, 모두가 아는바, ‘근대’이다. 근대문학이란 무엇이뇨. 국어로 하는 문학을 가리킴이 원칙이다. 국어란 또 무엇이뇨. 국가어의 준말이다. 이 경우 국가란 국민국가를 가리킴이 아닐 수 없다. <무정>(1917)이나 <진달래꽃>(1925)이 한국 근대문학인 것은 그것이 한국의 국어로 씌어졌음에서 말미암았다.
여기에는 자칫하면 이런 의문이 솟기 쉽다. 일제의 식민지로 편입된 마당인데 어디 한국의 국민국가가 있었던가가 그것. 이 의문이란 실상은 당초부터 성립되지 않는다. 상해 임시정부가 엄존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 통치부는 교육제도, 행정제도, 토지제도, 금융제도 등을 식민지화했지만 문학만은 당초부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제가 한국문학을 식민지화하기로 작정한 것은 1942년 10월 1일을 기점으로 했다. 조선어학회 사건(1942. 10. 1)이 그 증거이다. 33인을 이 사건에 연루시킨 것도, 총독부 시정일(始政日)을 겨냥한 것도 이를 말해주고 있다.(이인, <반세기의 증언>, <조지훈 문학전집(4)>)
조선어학회란 새삼 무엇이뇨. 숨은 신으로서의 ‘한국 국민국가’의 대행기관이자 그 실체였음이 정답이다. 조선어연구회(1921)를 이어받은 조선어학회(1931)는 국민국가로서의 임시정부의 대행기관이기도 했다. 맞춤법통일안(1933)이 발표되었을 때, 당시의 문인 78명(이광수, 이태준, 김기림, 박태원, 정지용, 임화, 염상섭, 이기영 등)이 전폭적으로 호응한 것도 이를 새삼 증거한다. 일제 통치부가 한국문학마저 식민지화하고자 한 것은 따라서 조선어학회 사건 이후이다. 그동안 한국 근대문학은 근대문학으로서 완전한 것이었다. 검열 따위란 이 대원칙에 비하면 한갓 사사로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사회에서나 터부란 있는 법이기에 그러하다. 문학이란 어떤 터부도 뛰어넘기에 그러하다.
거듭 말하지만, 일제 통치부가 한국문학을 식민지화하고자 한 시기는 1942년에서 광복(8·15)까지 2년 2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기간 동안에도 우리 문인들은 일어로, 혹은 조선어로 이런저런 글을 썼다. 이른바 이중어글쓰기 공간의 글쓰기가 진행되었다. 그런 글들의 평가 기준 및 의의는 별개의 연구과제라 할 것이다.
한국근대문학사의 시선에서 보면 이 암흑기는 어떠할까. 물론 암흑기일 수 없다. 중경 임시정부가 엄존해 있었음과 동시에, 조선어학회의 법적 투쟁이 진행중에 있었음이 이를 새삼 말해준다. 조선어학회 공판(1945. 1)이 있었지만 고등법원에 상고했고 그것이 기각된 것은 1945년 8월 13일이었다.
조선어학회란 새삼 무엇이뇨. “조선 독립을 위한 실력 신장의 수단”(판결문)이었다. 곧 문학의 처지에서 보면 한국의 국민국가의 언어를 관장하는, 국내에서의 실체였다. 그동안 한글날을 국경일로 해왔던 이유 중의 으뜸 항목은 여기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