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보의'(民堡議)는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자 정약용이 1812년(순조 12) 봄에 유배지 강진에서 지은 책이다.
정약용은 이 책을 왜 지었을까.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2년에 양반・중인・양민・천민으로 조직된 속오군(束伍軍)을 창설하여 지방 백성들을 지키고자 하였다. 속오군은 전란이 끝난 후에도 유지되었고, 1681년(숙종 7)에는 20여만 명으로 급증하여 조선 후기 지방군의 주축이 되었다.
그러나 5군영 체제가 정비되면서 속오군은 점차 유명무실해지고 말았으며, 급기야 정약용이 살았던 당시 농촌사회는 군사적으로 거의 무방비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1811년 겨울에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고 조만간 왜적의 침략이 있으리라는 유언비어까지 남해안 지방에 퍼지자, 수많은 지역 주민은 집을 버리고 뿔뿔이 달아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일을 목격한 정약용은 실제로 왜적의 침략을 당했을 때 주민들이 도망치지 않고 서로 단결하여 스스로를 지키고 적을 물리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였고, 이듬해인 1812년 봄에 '민보의'(民堡議) 1책(3권)을 완성하였다.
그렇다면 '민보'(民堡)란 무엇인가. '보'(堡)는 조선시대에 국경의 요충지에 설치한 작은 성을 일컫는 말로, 국가가 설치하고 운영하였다. 그러나 민보는 국가가 아닌 백성들이 만든 소규모의 성(城)이며, 관청의 개입 없이 오직 백성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면서 난리가 일어났을 때를 대비하는 것이다.
그래서 적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바로 각 마을의 촌민들은 모두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민보에 결집하여 인명과 재산을 보전하는 한편, 적이 이용할 수 없도록 마을의 물자를 깨끗이 없애버리는 전법을 사용하였다.
정약용은 민보에 의한 농민자위체제에 대해서는 명나라의 모원의(茅元儀)가 저술한 '무비지'(武備志)를 참고하였고, 민보를 설치하는 방법은 윤경(尹耕)의 '보약'(堡約)을 참고하였다. 그러나 '민보의'에 담긴 대부분의 내용, 즉 ▷민보를 설치할 곳을 고르는 방법 ▷민보의 축성 방식 ▷민보에서 적을 막는 방법 ▷민보의 민병을 조직하는 방법 ▷민보에서 양식을 지탱하는 방법 ▷민보에서 농사짓는 방법 등에 대해서는 조선의 지리적 형세와 임진왜란의 경험 등에 비춰 독자적으로 구성하였다.
정약용은 전란이 일어났을 때 백성들이 민보에 들어가야 자신을 지킬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나라를 지키고 임금을 구원하는 것이 모두 민보에서부터 나온다고 하였다. 그리고 의병(義兵)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민보라고 하며 민보의 중요함과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정약용이 '민보의'에 기술한 무수한 주장은 끝내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고 말았다. 병인양요가 일어난 다음 해인 1867년에 훈련대장 신헌(申櫶)의 건의로 조정도 뒤늦게나마 민보방위체제를 시행하자는 결정이 있기는 하였지만, 결국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그러나 신헌의 '민보집설'(民堡輯說)과 저자 미상의 '어초문답'(漁樵問答)과 같은 책에서 민보에 대한 발전적 논의를 이어갔고, 이후 동학농민전쟁이나 한말 의병전쟁에서 민보를 기반으로 삼아 투쟁을 전개한 것을 보면 정약용의 민보에 대한 주장이 전혀 실행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만약 정약용의 주장대로 민보가 설치되고 제대로 운영되었다면 일제(日帝)의 침탈에 그처럼 속절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봉남 교수(한문교육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