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특별전

내가 찍은 우리 시대/이경모(동신대 교수) N

No.1214083
  • 작성자 허미영
  • 등록일 : 2012.07.25 16:21
  • 조회수 : 835
내가 찍은 우리시대
 
이  경  모 (동신대학교 사진영상학과)
 
관련사진  
 나는 1926년 전남 광양에서 태어나, 광양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보통학교 5∼6학년 때, 작은형의「토고도(東鄕堂)」카메라를 가지고 몰래 사진을 찍어 보다가 들켜서 형에게 얻어 맞곤 한 적이 있다. 그 카메라는 비록 장남감이었지만 사진이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현상약은 빨간색, 정착액은 파란색, 필름홀더는 검은 종이로 싸여 있었는데, 홀더를 현상액에 담궈두었다가 화상이 떠오르면 다시 정착액에 담구어 사진을 얻는 것이었다. 사진이 나오는 것이 신기하여 작은형의 어깨너머로 현상과정을 지켜보곤 하였는데, 이것이 나로서는 최초의 사진적 경험이었다.
그 후. 광주 서중학교 입학선물로 조부님이 사 주신「미놀타 베스트(Minolta Vast)」카메라는 사진과 더욱 가까워 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 카메라 덕분에 오늘날까지 사진을 해왔지만, 사실 그 당시의 장래 희망은 화가였다.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1944) 서양화 부문에서 25호 짜리 정물화가 입선된 적이 있었는데, 이는 광주 서중 개교이래 최초의 수상이기도 하였다. 재학시 그림
 
 
에만 열중하다가 낙제를 하여 2학년을 두 번 다녔기에 6년 만에 졸업(1945)을 하였다. 졸업 후 진로에 대한 가치관과 이견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집에서는 환쟁이를 시킬 수 없다고 하며 경성 법전을 요구하였으며, 나는 미술학교를 고집하며 버티다가 결국 진학을 못하게 된 것이다
1946년 1월 나는 이은상 선생의 배려로 호남신문사(광주일보 전신) 사진부장으로 취임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은 내 인생의 진로가「사진의 세계」로 자리 잡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당시 사진부는 제판기술자 한 명, 사환 한 명. 그리고 나 등 모두 세 사람뿐이었다. 그 해 12월 전남 예술사진 연구회 주최의 해방기념 전남 예술사진전에서 (생활)이라는 작품이 특선으로 입상하면서, 사진작가로서의 첫발을 딛게된다.
1948년 10월에는 호남신문 사진부장 신분으로 여순사건을 종군 취재하였다 당시에는 828필름을 사용히는 거리연동식 카메라(Kodak Special Bantam)를 사용하였다. 828필름은 코닥에서 만든 것으로서, 35mm 필름과 비슷한데, 다만 퍼포레이션 구멍이 없는 대신 뒤에 리드 페이퍼가 있었다.
1950년 8월에는 정훈국 보도과 사진대 문관으로 6/25전쟁을 종군하였다. 당시에 사용하였던 카메라는 라이카 ⅢB, F3.5/50mm렌즈와 코닥 Plus-X필름을 주로 사용했고, 현상약은 D-76, D-72였으며, 인화지는 일제를 사용하였다
앞서 밝혔듯이, 원래 필자는 서양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사진가가 된 것을 후회하고 외도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에 와서는 근 50년 가까이 사진계라는 울타리 안에서 일해온 것을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최초로 사진활동을 시작한 호남신문사는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으며, 6/25전쟁 당시 사선을 넘나들며 촬영한 사진들은 현상처리 불량으로 이미 변질되어 버렸다. 현재 가지고 있는 사진들은 따로 휴대하고 다니던 나의 카메라로 촬영해 두었던 것들이다.